평양 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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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마다 음악 소조에서 오후 3시부터 저녁 8시까지, 설맞이 공연 때는 11시까지 집중 연습을 하는데 보통 악기별로 바이올린 1조, 첼로 2조, 무슨 아코디온 1조, 2조, 이렇게 부르는 이유가 있다.
음악조에서 1~2년 이상 되면 1조가 되어 각종 행사와 군 구역 설맞이공연 또는 3년되면서 부터 1조에서 뽑아서 전국 축전 준비도 한다.
2조는 초보에서 중간까지인데 혹시 그중에서 인물이뛰어나면 2조라도입씽크식으로 중창단에 속해서 축전에 나가기도 한다.
나는 가야금을 잘 타지는 못해도 노래와 안쌈불로 당선되어 평양 축전에 갔었다. 우리 학교는 창을 기본으로 하고 있던 터라 첫 가야금 병창으로 축전에 갔었다.
가야금조 9명, 민족 기악 반주조가 더 많았었다.
체육 무용하면 청수 중학교와 라남의 천태선 선생님이 유명하고 창 하면 명천 여중과 청진 애들, 기악하면 송평남중과 반죽 애들이 거의 독차지 하다 싶이 한다.
전국대학생 축전도 물론 남포나 평안도 애들도 유명하기는 하다만 그래도 체육이나 음악 하면 함경도 혜산이나 청진이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는 셈이다.
군이나 구역에서 해마다 하는 설맞이 공연은 늘 참가 하는것이라 별로 신경을 안쓰지만 축전 한번 간다하면 연습부터 맹열하다.
학부형들 간식 보장으로 부터 시작해서 의상 준비와 여비 마련까지 학교에서 주는것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므로 간부들 신세도 져야 하고 후원금도 들어 오지만 학부형들도 많이 노력한다.
집중 연습에 들어 가면 수업도 많이 빠지게 되는데 떨어지는 과목에 대비하여 방학기간에 기본과목 보충 수업을 받는다.
평상시에는 아무리 밤늦게 까지 연습을 해도 간식이 없지만 축전 준비 기간에는 정상적으로 간식이 공급 되고 배도 실지많이 고팠던것 같다.
같은 학년인데도 남자애들이 항상 더 많이 먹어도 헉헉 댈 정도로 연습 강도가 세다. 아침 부터 밤 늦게 까지,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가 싶지만 그 때는 지루 한것을 별로 몰랐다.
선생님도 땀 흘리면서 지휘를 하시고 애들도 거울 앞에서 하루 종일 연습하는데 역시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면 완전 호사 시간이 돌아 온다.
음악 소조에서는 별로 싸웠던 기억이 없다. 음악소조 생활 5년 동안 오빠 언니들도 좋았지만 우리가 커서 아래 학년 아이들도 말을 잘 들었던 것 같다.
하긴 음악소조에 들어 가면 제일 먼저 하는것이 악장말을 선생님 말씀 다음으로 복종해야 하고 파트장들 역시 학년에관계 없이 악장 지시대로 움직여야 한다.
음악 소조에서는 감정을 가지면 음악을 할 수가 없으므로 자기 감정을 내키는대로 다 표현 할 수 없다고 늘 인성을 가르친다.
서로 존중하라고 하기 때문에 한 학년만 이상이라도 누구 오빠 누구 언니라고 꼭 존경어를 쓰도록 하고 한학년이라도 아래면 어떤 말이던 무조건 받아 주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역시 어디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구호대로 살도록 하지만 특히 음악 하는 애들은 매일 총화 시간에 파트장들이 보고를 하고 악장이 하루 일과 총화를 하는데 어떤 때는 눈물을 쏙 빼도록 비판을 받기도 한다.
울면서도 음악 소조에서 빠지는 것은 정말 서러울 정도로 애착이 강하다.
매일 아침 손풀기훈련 시간인데 내 소리네 소리 귀가 아퍼서 듣기 어려울 정도지만 그래도 그 덕에 잘 못하는 솜씨라도 앞에 있는 대형거울을 보면서 자신있게 막 할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순풀기 시간이 지나면 30~40 분동안 파트별 연습에 들어 가는데 파트장의 신호에 맞추어서 1조 2조 따로 연습한다.
종합 연습을 하다가 잘 맞지 않으면 다시 파트별 연습 시간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2~3 일 후 부터는 계속 종합 연습만 진행 한다.
지루 할까봐 중간 중간에 재미나는 연습곡이나 지나간 음악들을 복습 하기도 하면서 될수록이면 즐거우면서도 긴장하게 그리고 공부가 되게 하루 하루 연습을 한다.
매격주 목요일 저녁이면 시간이 되시는 부모님들이 오셔서매 학생들 실력들을 보여 드리기도 하는데 우리 부모님들은 시간이 없으셔서 한번도 와 보신적이 없었지만 다른 학부모님들 앞이라도 늘 자신있게 나가서 연주하여 누구는 정말 많이 늘었다고, 정말 대단하다고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드디어 평양에 가는데열차 도중 식사며 물은 단체로 준비 해주고 학부모님 몇이 따라 가면서 챙겨 준다. 평양에 내리면 줄을 서서 개찰구를 빠져 나가는데 단체 버스가 마중나와 우리를 태우고 갔다.
평앙서 나고 자랐고 또 아버님 따라 공군 기지마다 이사 다니면서도 평양에 이모님들이 있어서 방학마다 놀러 갔으니까 나는 평양이 하나도 놀라운것이 없지만 우리 친구들은 역전에 내릴 때부터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여기저기 보느라고 걸음 걸이도 느려진다.
여관에 도착하니 전국에서 모여온 많은 힉생들이 줄을 주욱 서서 순서대로 배정된 방에 들어 가고 씻고 나서는 이쁜 식탁보를 친 화려한 식당안에서 고기국에 이밥 그리고 맛있는 반찬들도 먹었다.
아떤 애들은 너무도 맛있고 신기해서 감동하는 것이 환히 보였다.
아침에 우리를 태운 버스가 시연회장에 도착 하였는데 이미 시작된 공연장은 긴장하다마다 무대가 아주 아주 어마 어마 하였다.
대기실에 있다가 우리 순서가 되어 기다리는동안 앞서 하는 3중창을 보았는데 그 애들은정말 이쁜 처음 보는 반짝이 금빛 은빛 무대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연습도 별로 못해보고가야금 조율만 마치고 서둘러무대에 올랐다.
첫 시연회에서 우리학교는 그만 떨어졌다. 문제는우리와 똑같은 작품을명천여중에서 가지고 나왔다고유출된 경위 때문에 선생님은 너무 분해서 난리도 아닌데 어머님들은 평양까지 와봤으면 됐다고 하면서 물건 사러 가는데만 급급했다.
그때 하얀 바닥 파란 비닐신이 처음 나올 때여서 어머니들은 좋아 난리고 애들도 선물 사러 우루루 몰려 다녔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온 애들도 있지만 선생님이 너무 많이 사는것을 통제하여 나는 돈을얼마 안썼지만 선생님이 책임지고 받아 준다면서 평양에 왔는데 하얀 바닥 신발을 하나씩 살 수 있게 몇명 애들에게 빌려 주라고 해서 선생님께 드렸더니 그애들 어머님들이 후에 고맙다고 엄청 나를 이뻐해줬었다.
떨어지면 다음날로 바로 지방에 내려간다. 오는 내내 애들은 지쳐서 자는데 선생님은 눈이 부어 있었던 생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선이 되어야 평양에 좀 더 있을 수도 있고 여러곳을 구경도 할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첫 축전을 맥없이 다녀 왔지만 하얀 바닥 새파란비닐신을 신고 다니면서 우리 음악조애들은 그래도 마냥 즐겁기만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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