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곡밥
2014-12-0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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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어머님의 형부가 조선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 영국 축구에서 지고 돌아 온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큰아버지는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추방되어 어디론가 실려 갔고 축구단원들도 박두익이를 제외 하고는 다 큰집에 들어 간것으로 안다.
얼마 후에 우리 친정 아버님도 공군대학 비행 강좌장으로 발령받아 청진에 이사하게 되었다.
항상 최고급으로 살던 우리가 갑자기 그냥 평범한 일반 주택에 살게 되고 매주 마다 공급 받던 것들 대신 일반 사회 상점에서 공급 표 대신 돈을 내고 물건을 사야만 하였다.
어느 날 학교에 전학을 갔는데 애들이 하는 함경도 말투가 겁나게 세게 들려서 싸우자고 덤벼 드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나를 주눅이 들게 하였다.
맵짜게 추운 그 곳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 아니 죽으라고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암튼 어렵게 적응했던 것 같다.
그래도 감사 해야 한다는 어머님 말씀에 순응하면서 매일 새벽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동상 청소에 만근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친 짓인데, 참 ~~~ 왜 그렇게 살았는지 ~~~
그런대로 몇달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어느 날, 집에 가니 반년분 밀린 배급을 실어 왔다고 하는데 마대 몇개에 강냉이 쌀이 제일 많고 밀쌀도 있고, 밀가루와 입쌀이 제일 적게 담겨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머님께 어머니 이거 다 머예요?
하고 물으니까? 강냉이 쌀이라 그러신다. 쌀이요? 나는 쌀은 입쌀과 찹쌀만 쌀인줄 알았었는데 세상은 동등하지가 않았다.
비행사 가족들은 애기까지 80% 입쌀에 10%는 찹쌀과 10% 고급 밀기루를 하루 일인당 1 키로씩 공급 받았고, 베개 처럼 생긴 쏘련제 흘레브와 빠다는 매달 공급이 되었었다.
물론 쵸콜레트도 정상 공급이 되었었고, 매주 마다 과일이나 소고기 돼지 고기와 칼파스 훈제 같은 것들은 다 먹지 못해 친척들이 오면 남기 바쁘게 가져 가군 했었다.
우유 차가 오면 집집마다 식구 수만큼 하루 300 그램씩 받아다가 설탕 가루를 넣고 끓여 먹기도 하고, 겨울이면 명태를 주렁 주렁 걸고, 제철 과일 때 맞춰서 제일 먼저 실어다 나누어 주고, 가을이면 사과를 한가마니씩 나누어 주고, 하여튼 그런 시절은 지나가고 함경도에 이사해서 부터는 평범한 사회 일반인 생활이 시작 되었었다.
한 반년을 사니까 그 때 부터는 제대 할 때 양식 공급장이 준 쌀마대들도 거덜나고 말았다.
하루는 어머님이 잡곡밥을 해 주셨었는데 기억에 입안이 엄청 깔깔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니 점점 잡곡 밥에 익숙하고 언제 부터 인가는 그것이 속을 더 든든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나는 이 잡곡이 그렇게도 귀하고 귀할 줄을 어떻게 알았으랴. 한 공기를 넣고 채소와 산나물을 넣고 죽도 쑤어 먹을 때 아! 그 강냉이 쌀이 금쌀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나마도 없어서 하루 두끼 먹다가 나중에는 하루 한끼 밖에 못먹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낟알이 아무것도 없는데 눈이 강산 같이 왔다.
눈물도 다 말라 나오지 않고 애들은 기운이 없이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아침에 맏이가 친구랑 어디 간다더니 저녁이 되어서 국수 세 사리를 가지고 들어 왔다.
어디서 생긴거냐고 하니까 친구 향옥이네 구르마에다 나무를 해서 실어다 팔아서 일곱 사리를 받았는데 한사리는 구르마 값으로 주고 똑같이 나누어 왔다고 한다.
그날에 너무도 감동해서 딸내미를 붙잡고 눈물을 줄줄 훌렸었다. 나라에서 배급도 끊기고, 그래도 출근은 해야 하니 저녁에 집에 오는 걸음이 천근 만근이었었는데, 아 이런일이 ! ~~~
그날에야 나도 더는 이렇게 살수가 없음을 알고 팔삼 신청서를 넣고 여행증을 발급 받아가지고 생활전선에 나섰다.
잡곡쌀 1키로를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 했던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겪어 봤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잡곡밥을 먹으면서 가끔씩 초심을 잃고 살 때가 많지만 그래도 고난의 행군 그 시절을 생각하면 조금씩 정신이 들고 힘을 내기도 한다. 오늘도 잡곡밥을 먹으면서 ~~~
항상 최고급으로 살던 우리가 갑자기 그냥 평범한 일반 주택에 살게 되고 매주 마다 공급 받던 것들 대신 일반 사회 상점에서 공급 표 대신 돈을 내고 물건을 사야만 하였다.
어느 날 학교에 전학을 갔는데 애들이 하는 함경도 말투가 겁나게 세게 들려서 싸우자고 덤벼 드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나를 주눅이 들게 하였다.
맵짜게 추운 그 곳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 아니 죽으라고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암튼 어렵게 적응했던 것 같다.
그래도 감사 해야 한다는 어머님 말씀에 순응하면서 매일 새벽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동상 청소에 만근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친 짓인데, 참 ~~~ 왜 그렇게 살았는지 ~~~
그런대로 몇달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어느 날, 집에 가니 반년분 밀린 배급을 실어 왔다고 하는데 마대 몇개에 강냉이 쌀이 제일 많고 밀쌀도 있고, 밀가루와 입쌀이 제일 적게 담겨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머님께 어머니 이거 다 머예요?
하고 물으니까? 강냉이 쌀이라 그러신다. 쌀이요? 나는 쌀은 입쌀과 찹쌀만 쌀인줄 알았었는데 세상은 동등하지가 않았다.
비행사 가족들은 애기까지 80% 입쌀에 10%는 찹쌀과 10% 고급 밀기루를 하루 일인당 1 키로씩 공급 받았고, 베개 처럼 생긴 쏘련제 흘레브와 빠다는 매달 공급이 되었었다.
물론 쵸콜레트도 정상 공급이 되었었고, 매주 마다 과일이나 소고기 돼지 고기와 칼파스 훈제 같은 것들은 다 먹지 못해 친척들이 오면 남기 바쁘게 가져 가군 했었다.
우유 차가 오면 집집마다 식구 수만큼 하루 300 그램씩 받아다가 설탕 가루를 넣고 끓여 먹기도 하고, 겨울이면 명태를 주렁 주렁 걸고, 제철 과일 때 맞춰서 제일 먼저 실어다 나누어 주고, 가을이면 사과를 한가마니씩 나누어 주고, 하여튼 그런 시절은 지나가고 함경도에 이사해서 부터는 평범한 사회 일반인 생활이 시작 되었었다.
한 반년을 사니까 그 때 부터는 제대 할 때 양식 공급장이 준 쌀마대들도 거덜나고 말았다.
하루는 어머님이 잡곡밥을 해 주셨었는데 기억에 입안이 엄청 깔깔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니 점점 잡곡 밥에 익숙하고 언제 부터 인가는 그것이 속을 더 든든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나는 이 잡곡이 그렇게도 귀하고 귀할 줄을 어떻게 알았으랴. 한 공기를 넣고 채소와 산나물을 넣고 죽도 쑤어 먹을 때 아! 그 강냉이 쌀이 금쌀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나마도 없어서 하루 두끼 먹다가 나중에는 하루 한끼 밖에 못먹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낟알이 아무것도 없는데 눈이 강산 같이 왔다.
눈물도 다 말라 나오지 않고 애들은 기운이 없이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아침에 맏이가 친구랑 어디 간다더니 저녁이 되어서 국수 세 사리를 가지고 들어 왔다.
어디서 생긴거냐고 하니까 친구 향옥이네 구르마에다 나무를 해서 실어다 팔아서 일곱 사리를 받았는데 한사리는 구르마 값으로 주고 똑같이 나누어 왔다고 한다.
그날에 너무도 감동해서 딸내미를 붙잡고 눈물을 줄줄 훌렸었다. 나라에서 배급도 끊기고, 그래도 출근은 해야 하니 저녁에 집에 오는 걸음이 천근 만근이었었는데, 아 이런일이 ! ~~~
그날에야 나도 더는 이렇게 살수가 없음을 알고 팔삼 신청서를 넣고 여행증을 발급 받아가지고 생활전선에 나섰다.
잡곡쌀 1키로를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 했던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겪어 봤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잡곡밥을 먹으면서 가끔씩 초심을 잃고 살 때가 많지만 그래도 고난의 행군 그 시절을 생각하면 조금씩 정신이 들고 힘을 내기도 한다. 오늘도 잡곡밥을 먹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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