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행복했던 나날들-2
2014-07-31 15:11
2,216
0
0
본문
드디어 마지막 결과 발표날 우리 구역에서는 총 11개 학교에서 학생 8명과 책임지도원 1명, 그리고 구역사로청부위원장님, 이렇게 총 10명이 가게 되었다.
구역사로청위원장님은 우리들을 모여 앉혀 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동무들은 당의 배려로 평양에서 열리는 "조선조년단 창립 45돐기념 전국 소년단대회"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두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거기 뽑힌 학생들끼리 서로 부둥켜 안고 폴짝폴짝 뛰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제가 우리구역 소년단대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에 학교친구들 모두가 축하를 해줬다.
우리학교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나에게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학급에서 항상 저랑 같이 노는 단짝친구들이 자기들 부모님께 말씀드려 5원짜리 10원짜리 돈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또 외할머니도 늘쌍 지니고 계셨던 쌈지돈 200원을 내놓으시며 잘 다녀오란다. 정말 천만 다행이도 빈손으로 갈뻔한걸 면할 수 있었다.
돈은 해결되었고 이번에는 가방이 없다. 그때 준비물로 딸라가방을 가져오란다.
우리집에 딸라가방이 있을리 있는가.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이전에 나한테서 중요한 서류를 얻고 '최우등생 대회'에 참가하여 715 최우등상까지 수여받은 모학교 언니가 생각났다. 우리집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그 언니네 집이다. 높은 담장에 우리우리한 기와집에 엄마랑 같이 가서 부탁했더니 나한테 신세진것도 있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빨간 딸라가방을 내놓는 것이었다. 가방도 돈도 다 마련해 놓으니 이젠 시름이 놓였다.
평양에 가기 이틀전 우리는 모두 도사로청으로 향했다. 도사로청 마당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잠시 후 집합구령과 함께 거기 있던 대회참가생들이 줄을 맞춰 섰다. 그날은 뙤약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5월 말 어느날이였다. 집합구령에 맟춰 대열을 맟춰 서있는데 앞에는 아무 사람도 없고 학생들을 그냥 1시간 이상을 세워두는 것이었다.
뒤에서 우리 구역사로청부위원장선생님이 제 머리우에 흰 손수건을 얹어주셨다. 시간이 한시간 지나서 옆에 서있던 애들이 하나 둘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 놀라서 쳐다보니 선생님들이 하나 둘 쓰러진 학생들을 데리고 청사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한시간반쯤 지났을때쯤 이젠 돌아가도 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말해주시길 더위먹는 학생들을 또 선별해냈다는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더위 먹으면 쓰러진다는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알 수 있게 되었다.
더위먹는 학생들은 갈 수가 없는것이다. 다행이 우리 구역 8명 학생들은 한명도 탈락하지 않았다.
아마 6월6일 소년단행사는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리는데 해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야외에서 오래 서있을 수 있는지 테스트를 했었나보다.
드디어 평양으로 출발하는 날이 왔다.
그날 뜻밖에도 그동안 소식이 없던 내 친구 옥이가 우리 대열에 들어섰다.
옥이는 우리 학급 분단위원장을 하는 애였다. 아빠가 힘있는 기업소 초급당비서로 우리 구역에서 걔네아빠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 할 정도로 능력자이셨다. 도, 시, 군 간부들을 손바닥안에 쥐락펴락 하는 걔네 아빠는 옥이가 첫 선별에서 떨어지자 친구인 도당책임비서와 사업하여 옥이를 도본트(도에서 뽑힌)로 대회에 참석시킨 것이었다.
밤 11시면 우리는 혜산-평양행 4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떠난다.
잠시 모모시에 자리잡은 어느 한 아파트에서 함께 모여 저녁 기차 탈 시간만 기다리면서 한달동안 부지런히 사귄 대회참가자 오빠들과 친구들이랑 선생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5층아파트 4층에 있는 집이었는데 물이 안나와서 그날 물도 길어주고 아주 신났다. 그들이 도중식사로 싸온 음식도 나눠먹으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면서....
점심시간에는 옥이네 아빠 공장 식당에서 이쁜 언니들이 날라다 주는 냉면에 빵에 맛있는거 실컷 먹고...
그날 생각도 못했던 아빠가 저를 배웅해 주셨다. 맨날 혼은 내셔도 속은 깊으셨던 무뚝뚝하신 나의 아빠였다.
드디어 밤 11시 우리를 태우기 위해 역에 혜산 평양행 열차가 들어선다. 빵~ 드디어 왔구나. 너무나도 가고싶던 평양, 전국 몇십만 소년단원들중 3000명이 뽑힌 대회에 대표라니 와~
구역사로청위원장님은 우리들을 모여 앉혀 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동무들은 당의 배려로 평양에서 열리는 "조선조년단 창립 45돐기념 전국 소년단대회"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두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거기 뽑힌 학생들끼리 서로 부둥켜 안고 폴짝폴짝 뛰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제가 우리구역 소년단대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에 학교친구들 모두가 축하를 해줬다.
우리학교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나에게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학급에서 항상 저랑 같이 노는 단짝친구들이 자기들 부모님께 말씀드려 5원짜리 10원짜리 돈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또 외할머니도 늘쌍 지니고 계셨던 쌈지돈 200원을 내놓으시며 잘 다녀오란다. 정말 천만 다행이도 빈손으로 갈뻔한걸 면할 수 있었다.
돈은 해결되었고 이번에는 가방이 없다. 그때 준비물로 딸라가방을 가져오란다.
우리집에 딸라가방이 있을리 있는가.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이전에 나한테서 중요한 서류를 얻고 '최우등생 대회'에 참가하여 715 최우등상까지 수여받은 모학교 언니가 생각났다. 우리집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그 언니네 집이다. 높은 담장에 우리우리한 기와집에 엄마랑 같이 가서 부탁했더니 나한테 신세진것도 있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빨간 딸라가방을 내놓는 것이었다. 가방도 돈도 다 마련해 놓으니 이젠 시름이 놓였다.
평양에 가기 이틀전 우리는 모두 도사로청으로 향했다. 도사로청 마당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잠시 후 집합구령과 함께 거기 있던 대회참가생들이 줄을 맞춰 섰다. 그날은 뙤약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5월 말 어느날이였다. 집합구령에 맟춰 대열을 맟춰 서있는데 앞에는 아무 사람도 없고 학생들을 그냥 1시간 이상을 세워두는 것이었다.
뒤에서 우리 구역사로청부위원장선생님이 제 머리우에 흰 손수건을 얹어주셨다. 시간이 한시간 지나서 옆에 서있던 애들이 하나 둘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 놀라서 쳐다보니 선생님들이 하나 둘 쓰러진 학생들을 데리고 청사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한시간반쯤 지났을때쯤 이젠 돌아가도 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말해주시길 더위먹는 학생들을 또 선별해냈다는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더위 먹으면 쓰러진다는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알 수 있게 되었다.
더위먹는 학생들은 갈 수가 없는것이다. 다행이 우리 구역 8명 학생들은 한명도 탈락하지 않았다.
아마 6월6일 소년단행사는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리는데 해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야외에서 오래 서있을 수 있는지 테스트를 했었나보다.
드디어 평양으로 출발하는 날이 왔다.
그날 뜻밖에도 그동안 소식이 없던 내 친구 옥이가 우리 대열에 들어섰다.
옥이는 우리 학급 분단위원장을 하는 애였다. 아빠가 힘있는 기업소 초급당비서로 우리 구역에서 걔네아빠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 할 정도로 능력자이셨다. 도, 시, 군 간부들을 손바닥안에 쥐락펴락 하는 걔네 아빠는 옥이가 첫 선별에서 떨어지자 친구인 도당책임비서와 사업하여 옥이를 도본트(도에서 뽑힌)로 대회에 참석시킨 것이었다.
밤 11시면 우리는 혜산-평양행 4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떠난다.
잠시 모모시에 자리잡은 어느 한 아파트에서 함께 모여 저녁 기차 탈 시간만 기다리면서 한달동안 부지런히 사귄 대회참가자 오빠들과 친구들이랑 선생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5층아파트 4층에 있는 집이었는데 물이 안나와서 그날 물도 길어주고 아주 신났다. 그들이 도중식사로 싸온 음식도 나눠먹으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면서....
점심시간에는 옥이네 아빠 공장 식당에서 이쁜 언니들이 날라다 주는 냉면에 빵에 맛있는거 실컷 먹고...
그날 생각도 못했던 아빠가 저를 배웅해 주셨다. 맨날 혼은 내셔도 속은 깊으셨던 무뚝뚝하신 나의 아빠였다.
드디어 밤 11시 우리를 태우기 위해 역에 혜산 평양행 열차가 들어선다. 빵~ 드디어 왔구나. 너무나도 가고싶던 평양, 전국 몇십만 소년단원들중 3000명이 뽑힌 대회에 대표라니 와~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