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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있은일

북한에서 행복했던 나날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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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야기라고 하면 대부분 울적한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북에서 행복했었던 기억을 풀어보려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있은 일이다. 당시 한창 새 집을 짓느라 저희 집에서 일손이 많이 바쁠 때였다. 사회보장 환자로 집에 계시던 아빠는 그날 일손이 딸리시자 저를 학교에 안 보내시고 집에서 미장 도우미를 시키셨다. 아빠는 미장과 몰탈을 담는 나무판을 들고 계시고 나는 삽으로 잘 이겨진 몰탈을 아빠가 들고 있는 나무판에 놓아드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날 뭣때문에 혼이 나서 학교에 못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저는 학교에서 소년단위원장이 없는 소년단조직부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단위원장을 하던 오빠가 전학을 가고 나니 단부위원장인 제가 그 직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날도 아빠랑 집에서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데 학교 책임지도원 선생님이 헐레벌떡 우리 집을 찾으셨다.
"@@이 아버지. @@이를 왜 학교에 안 보내시는 겁니까" " 아빠 말도 안 듣는 애가 학교 가서 뭘 배울게 있겠다고" 아빠는 선생님 말씀에 퉁명스러운 답변을 하신다.

그러자 선생님이 저희 아버지 손을 꼭 잡으시고 오늘 중요한 일이 있으니 우선은 @@이를 학교에 데려가봐야 한다고 하시며 저에게 빨리 차비를 하랜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급히 교복을 갈아입고 선생님과 학교로 달려갔다. 학교 소년단실에 들어 가니 벌써 분단위원장 이상급 소년단 간부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책임지도원 선생님은 내게 단부위원장 간부 표식을 떼어버리고 단위원장 표식을 달아주시며 이제부터 넌 단위원장이다.
 이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빨리 구역사로청으로 가보라 하셨다.
원래 자기도 가야 하는데 구역에서 내린 토끼가죽 꼬마계획 집행을 못해서 올라가면 욕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책임지도원선생님 지시대로 학생 간부들을 데리고 구역사로청 청사로 향했다.

학교에서 구역사로청 까지는 빨리 걸어서 40분거리였다. 구역사로청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와있었다. 암만 둘러봐도 우리 학교처럼 학생들만 온 학교는 없었다.
왜 모이는지 궁금해있다가 알아본즉은 평양에서 중요한 대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거기 참가할 소년단대표를 뽑는 댄다.

와~ 평양에서 열리는 소년단대회라니.나도 갈 수 있을까?.
그때부터 제 마음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잠시 후 구역사로청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사무실에 모두 들어 오라고 한다.
들어와 앉으라는 말도 없이 사무실로 들어서기 바쁘게 " 자 이제부터 문제풀이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속셈 문제풀이를 진행하겠습니다. 정답을 아시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세요. 자 시작합니다. 000*0 얼마입니까?"라는 것이다.
이렇게 속셈문제 몇 문제 또 상식문제 몇 문제 등등 많은 문제를 풀었던 것 같다.
나는 너무 나도 뽑히고 싶은 마음에 답을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손을 버쩍버쩍 높이 쳐들었다.

문제풀이가 끝나고 구역사로청부위원장이 한 학생씩 짚어낸 후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집에 가랜다.
그때 우리 학교에서 저 한 명이 뽑혔다. 떨어진 학생들은 모두 눈물이 글썽하여 발길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돌아가는데 모두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뽑혔다고 해서 일이 이루어 지는건 아니었다. 다시 또 심사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부모님 직책을 물어보신다.
내차례가 되었다. "아버지 직업이 뭐에요" "아버지 사회보장환자입니다." "어머님은요" " @@고등중학교 선생님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아버님들이 모두 한다 하는 책임비서요, 부장이요. 지배인이요. 저 혼자 사회보장환자다.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이거 내가 갈 수 있을까? 뽑는 인원도 몇 명 안된다는데.쟤네들은 아빠들이 힘이 있어서 갈 수 있겠지만 난 아빠가 사회보장환자인데 어쩌지?" 등등 고민에 고민이 계속 되었다.


그날 구역사로청에서 모든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오는 한 시간 내내 머리 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또 다시 구역사로청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 어찌된 영문인지 또 몇몇 학생이 탈락 되었다. 탈락 된 학생들에게 집으로 가서 기다라는데 모두 운다. 사로청 청사 밖을 나가질 못하고 흐느낀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몇일후에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러워졌다.

그렇게 열흘째 이제는 학생이 8명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학교는 지도원선생님이랑 학생이 함께 있다. 나랑 또 한 명 여학생만 선생님이 안 계신다.
그날 한참 사로청청사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가 한대 들어오더니 커다란 박스를 몇 개 내린다. 소곤대는 말을 들어보니 모 학생이 엄마란다. 내 짐작에 뇌물을 고이러 온것이다. 그 뒤로 줄줄이 뇌물을 실은 차가 도착한다.

그것들을 목격하느라니 어린 마음에도 이러고만 있다가는 탈락되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우리집은 당시 집을 짓느라 형편이 많이 어려운 상태었다.' 이거 어쩌지? 다문 술 한병이라도, 담배 몇곽이라도 드려야 하는거 아닐까?' 그날 집에 돌아오는 내내 머리속은 복잡했다.

아빠보고 말씀드려봤자 그렇게까지 해야 갈 수 있는데라면가지 말라고 할테고 엄마한테 말하자니 없는 살림에 고생이 많으신 엄마한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있는 빈병을 두개 들고 당시 지역식료공장 사로청위원장을 하고계시던외삼촌을 찾아갔다.

"삼촌 평양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제가 거기에 참석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요. 삼촌 여기에 삼촌네 공장에서 생산하는 술 좀 받아갈 수 없을가요?"
. 내말을 듣던 외삼촌은 "네가 거기 뽑힐 수 있겠어? 괜히 아까운 술만 허비하는거 아니야? 간부집 자식들도 많은데 널 왜 뽑겠어"라고 하시며 마지못해 술을 담아주시는것이었다.
삼촌의 말에 맘이 좀 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라는 희망을 갖고 집으로 향하는데 계속 내머리속은 복잡했었던것 같다. 눈물도 흘리고...

술을 보면 아빠(당시 아빠는 타락상태)가 마셔버릴것 같아 감춰두고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다른 집 아빠들은 아이가 무슨 대회에 뽑히러 다닌다면 자랑을 하거나 대견해 할텐데 우리 아빠는 절대 기뻐도 기쁜 내색을 내지 않으셨다.
다음날친구한테 부탁하여 얻은 여과담배 한갑과 외삼춘에게서 얻은 술 두병을 들고 구역사로청지도원에게 드렸더니 그냥 허허 웃으신다.

몇일지나서 또 아빠한테 혼난 일이 있었는데 아빠는 저보고 낼부터 구역사로청 가지 말라고 아빠가 가서 모학생은 나쁜 학생이니 거기 참가할 자격없다고 말하겠다는 것이다.
그날 친구들이랑 구역사로청선생님들이랑 구역사로청 갔다가 오는데 아빠가 구역사로청쪽으로 가시는게 보였다. 이건 뭐지? 아빠가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나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그날 아빠는 구역사로청에 가시질 않으셨다.
또 몇일 후 아버님들을 데려오랜다. 그래서 아빠한테 말씀드렸더니 뭐라 하시면서도 구역사로청에 가셨다.

그날로 부터 몇일 후저녁 집에가보니 아빠랑 외삼춘이 같이 있었다. 외삼춘이 하는 말이 또 과관이었다. 자기가 구역사로청에 볼일이 있어 갔는데 대회 참가자 명단을 살펴보니 거기에 내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빠들이 빵빵한 애들도 많은데 너를 참가시키겠냐고 하면서 미련을 버리고 공부나 열심히 하랜다. 그날 정말 많이 울었다. 아빠도 속이 상하셨는지 한숨만 푹푹 쉬신다. 엄마도 맘이 많이 아프셨는지 말이 없으시다.

나는 그래도 매일 구역사로청을 향했다. 그때 @@학교 단위원을 하던 예쁘장한 친구가 있었는데 아빠가 @@해군대학 군관이었다. 걔네 엄마는 재봉을 참 잘했는데 같은 교복이라도 이쁘게 만들어 입혔다.
그 친구는 점심도시락도 내꺼까지 항상 같이 싸오군 했다. 지금도 둘이서 같이 구역사로청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던 김일성동상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나눠먹던 그때를 생각하면 맘이 설렌다.
그때 그 친구랑 내가 집이 제일 멀었다. 나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닐 형편이 안되서 점심밥을 굶고 다녔었는데 그 친구가 알고는 같이 먹자며 내손을 잡아 끌어주고 그 담부터는 구역사로청을 다니는 한달 내내 내 도시락까지 책임졌던 잊지 못할 친구다.

그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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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3

쵸친과바라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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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와. 계급. 차별이 없는 우리고향 ~~~~~  남쪽에선 이해르 못하져 ~~~~  나두같이 맘설레임돠 누군진 몰라두 ~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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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 친구를 왕따로 만든 사례는 없었죠. 오히려 학급이나 학교에서 한 애라도 다른 학급이나 학교애한테 맞고 오면 패싸움을 해서라도 보복을 했었던 시절이었던것 같아요. 와 학교끼리 패싸움 정말 많았던것 같아요.

유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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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문장도 편안하고 자영스럽게 잘 만드시고 글자도, 띄워쓰기도 잘 하시여 읽기가 아주 편합니다.
역시 학교 소년단 단 위원장이 다르긴 다르네요. 공부도 물론 잘 했고요.
오랜만에 내고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게되여 기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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